HOME  /  SEARCH  /  LOG IN  /  SIGN UP
사업개요 우리마을 명성독서실 C&C Korea 고객센터 인트라넷
마을안내
이충마을
역사/유래
이충마을 상가정보
생활정보 안내
생활정보 신청
수공예 전시장
서정마을
역사/유래
서정마을 상가정보
생활정보 안내
생활정보 신청
장당마을
역사/유래
장당마을 상가정보
생활정보 안내
생활정보 신청
 
 
 Home > 우리마을 > 이충마을 > 역사/유래
    이충마을 유래

◁동령마을 고개마루 성황목▷

■두 충신의 흔적이 서린 마을
이충동은 이충동현대아파트, 건영아파트, 경문대학 등으로 잘 알려진 마을이다.
하지만 이 지역이 개발되기 전에는 조광조와 오달제의 유허비가 있는 마을로 더 알려졌었다.
이충동(二忠洞)이라는 지명도 "두 충신(忠臣)의 유허가 있는 마을"에서 왔다.

지금은 충의각(忠義閣)이라고 불리는 이 비각은 본래 왕명에 의해 이곳에 세워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예컨대 왕이(순조임금으로 추정) 삼남대로를 따라 남행하다가 칠원동 갈원(葛院)에서 다리쉼을 하면서 이 지역에 명현(名賢)을 천거하라고 하자 신하들이 주변에 조광조 선생의 유허가 있음을 고했다. 왕은 명을 내려 유허비를 세우도록 하고 그 뜻을 기리게 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평택시에서 편찬한 다른 기록들은 왕명이 아니라 진위유림들이 주동했다고 하면서, 조광조 선생의 유허비를 달구지에 싣고 가던 중 동령 성재부근에서 말이 움직이지 않자 이유를 알아보니 주변에 오달제 선생의 옛 집터가 있어서 함께 비문에 새겨 건립했다는 설화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런데 동령마을 노인회장 박희복(76세) 옹이나 다른 마을 사람들은 본래 추천된 인물은 조광조 선생이 아니라 오달제 선생이었고,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오학사 비(碑)"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위의 세 가지 주장 중에서 어느 것을 사실로 믿어야 할까. 나는 마을 사람들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국가나 지배층과는 달리 민중들의 구전이라는 것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가감되는 측면은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시키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의 주장을 토대로 이야기를 재구성하면, 본래 지역 유림들이 오달제 선생의 생가 터에 유허비를 세우려고 하자 한 쪽에서 조광조 선생의 유허도 있으니 함께 세우자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래서 양자간 합의로 비(碑)를 세웠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오달제 선생보다 지명도가 높은 조광조선생이 더 추앙을 받게되었고 나중에는 건립 과정까지 왜곡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두 분의 유허비는 이충동(二忠洞= 두 충신이 살았던 마을)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듬뿍 담긴 지명을 만들어냈다.

■정제(井祭)와 줄다리기로 풍년을 기원하고
이충동은 부락산(또는 불락산) 남쪽에 자리한 마을로 원이충, 동령, 석정, 신리, 광말과 같은 자연마을이 있다.
이 지역은 조선 초까지 송장부곡 또는 송장현이었고, 15세기 진위현에 편입되고 조선 후기 면, 리제가 실시되면서 송장면으로 편재되었던 곳이다.

원이충 마을은 건영, 미주, 부영아파트 단지 한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지명으로 볼 때 조광조 선생과 오달재 선생의 집터가 이 마을에 있었던 것으로 본다. 석정은 "돌우물"이라는 지명으로 잘 알려졌다. 원곡 송탄 간 340번 지방도를 달리다 보면 송탄고등학교 못미처 돌우물 가든과 빠리지엔느 산후조리원 남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석정마을에는 칠원의 옥관자정, 신장동 제역마을의 박우물과 함께 송탄지역의 3대 우물이었던 "돌우물"이 있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우물은 마을 형성에 아주 중요한 요소였고, 좋은 우물이 있는 곳에는 우물 이름이 지명으로 굳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돌우물"도 그 중 하나이다.
신리와 광말은 20여 호의 규모에 개척된지 6, 70년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이다. 게다가 주변지역이 개발되고 340번 지방도가 마을을 가로지르는 바람에 모양이 후줄근하다.
신리는 "새말" "신대"와 같은 지명으로 새로 생긴 마을을 뜻하고, 광말은 들판에 자리잡은 마을을 의미한다.

이충동에서 마을다운 마을은 동령(東嶺)이다.
부락산을 중심 축으로 성재와 작은 흰치재가 살포시 감싸 안은 자리에 위치한 이 마을은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포근히 감싸주는 미덕을 지녔다.
동령은 옛 송장현(부곡)의 치소(治所)였을 것으로 짐작되며, 동령마을 성터가 마을을 감싸 안았던 것으로 판단되는 곳이다. 성터가 있었음은 미주아파트 남쪽의 성물백이(성문 밖)라는 지명과 성재(성고개)라는 고개이름에서 알 수 있는데, 지금도 성물백이에서는 밭을 갈면 기와조각과 주초석 등이 출토되어 성곽과 함께 관아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곳의 성곽에는 옛날에 군대가 주둔했다고 말하지만 그보다는 치소(治所)와 관계된 읍성(邑城)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성물백이와 마을 사이의 작은 골짜기는 암탉골이다. 이 곳에는 진주 소씨들의 선영(先塋)이 있어 도일동, 칠괴동, 소골과 함께 이 지역의 명문가였을 진주 소씨의 흔적을 보여준다.
마을 동쪽 장안동으로 넘어가는 작은 고개를 성황고개라고 한다. 고개 정상에는 몇 백년 된 느티나무가 그보다 작은 참나무를 감싸안고 있다. 옛날에는 이 곳에 성황당이 있었고 느티나무는 성황목이었다. 성황목은 신령스러워서 가지를 자르면 동티가 나서 함부로 범접하지 못했다고 한다.

동령마을 하면 정월 초순 용날에 거행되는 용왕제(우물제=정제)와 줄다리기로 유명하다. 줄다리기는 새끼를 암, 수로 꼬아서 암줄은 여자와 아이들이 잡고 숫 줄은 남자들이 잡았다. 놀이는 반드시 여자가 이기도록 했는데, 여자는 풍요와 생산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줄은 반드시 마을 앞 아카시아 나무숲에 버렸다. 그래야만 풍년이 든다는 것이었는데, 세월 탓인가 이제는 아카시아 나무도 다 베어져 몇 그루 안 남았다.

이동:  
 


  경기도 평택시 이충동 664-1 명성 스테이트빌딩 501호 TEL : 031-663-4305 대표 : 김학도
Copyright ⓒ 2007 (주)씨엔씨코리아 All rights reserved. / cnckorea@naver.com
Supported by ONTOIN